새 짤방

녹는다.jpg

불만있냐

우리는 가끔 달갑지 않은 선택과 직면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반드시 녹아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을 때, 더위로 녹아버리기와 습기로 녹아버리기, 그리고 자기 의지로 녹아버리기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좋을까요. 저는 셋 다 싫습니다. 그런 뜻에서 오늘은 스스로의 의지로 녹고 있는 어떤 새를 소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뭘 봐.뭘 봐.

위의 두 이미지는 오늘 소개할 사진이 사용된 짤방입니다. 상대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새는 굉장히 화가 난 듯 상대를 아니꼽게 바라보고 있는 동시에 녹고 있죠. 짤의 문구에서 이 새는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하겠다고 말하고 있는데요. 아니꼬운 표정을 지은 채 녹는 것 이상으로 뭘 얼마나 더 마음대로 하게 해주어야 저 새의 성에 찰지 모르겠습니다.


뭘 보냐고.

오늘의 짤의 원본은 지금으로부터 약 5년 전인 2013년 11월, 레딧에 올라왔는데요. 이 사진을 올린 레딧 유저 satjit101은 점심을 먹으려다가 땅으로 녹아들어가려 하는 존재를 보았고, 딱히 실례되는 언행은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새가 자신을 이렇게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왼쪽부터 브루어검은지빠귀의 수컷, 암컷, 흐릿한 수컷입니다. / Tom Benson, Richard Masoner on Flickr왼쪽부터 브루어검은지빠귀의 수컷, 암컷, 흐릿한 수컷입니다. / Tom Benson, Richard Masoner on Flickr

눈빛이 강렬한 오늘의 새는 브루어검은지빠귀(Brewer's blackbird)로 추정되는데요. 브루어검은지빠귀는 암수의 겉모습이 많이 다른 새입니다. 수컷은 광택이 도는 검은 깃털과 노란 눈을 가지고 있으며, 암컷은 갈색 깃털과 새까만 눈을 가지고 있죠. 간혹 암컷 중에도 드물게 광택이 도는 깃털이나 노란 눈을 가진 경우가 있으나, 수컷과 구분이 안 될 정도는 아니니 오늘의 사진 속 새는 수컷이라고 확신해도 큰 문제는 없겠습니다. 브루어검은지빠귀의 학명인 Euphagus cyanocephalus에서 cyanocephalus는 고대그리스어로 파란색을 뜻하는 κύανος(kyanos)와 머리를 뜻하는 κεφαλή(kephale)가 합쳐진 것인데요. 이는 푸른 광택이 도는 수컷의 머리를 보고 붙인 학명이라는 것을 쉽게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이 친구는 숙취가 좀 있어 보입니다. / sethoscope on Flickr

오늘의 새가 어떤 종인지를 알게 되었으니, 이어서 이 브루어검은지빠귀가 왜 녹고 있는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브루어검은지빠귀의 브루어(brewer)는 맥주 양조업자를 뜻하는 단어이죠. 그렇다면 이 새는 대대로 맥주 양조업에 종사하고 있고, 맥주를 만드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잠시 맥주처럼 녹아버리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맥주를 너무 많이 마셔서 취기 또는 숙취로 녹은 것일 수도 있죠. 사실 이 새의 브루어는 미국의 조류학자 Thomas Mayo Brewer의 이름을 따온 것으로, 맥주와는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에 이 가설은 폐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땅에는 잘 녹지만 물에는 잘 녹지 않는 모양입니다. / Rachid H on Flickr

브루어검은지빠귀는 주로 북아메리카 중부에서 번식하며, 북아메리카 남동부 및 멕시코에서 겨울을 나는 새들인데요. 오늘의 사진이 11월의 북반구에서 촬영되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 새가 더워서 녹아버렸을 확률은 극히 미미하다고 봅니다. 아마도 이 브루어검은지빠귀는 추위 대비를 위해 깃털을 빵실빵실빵실빵실하게 부풀렸고, 바닥에 앉으며 부풀린 깃털이 주위로 퍼져서 녹은 것처럼 보이게 되었을 것으로 예상되는데요. 하지만 만에 하나 혹시나 진짜로 녹고 있는 것이라면 정말 대단하다는 얘기 전해주고 싶습니다.


브루어검은지빠귀와 흰점찌르레기(common starling) 무리라고 합니다. / JAMES MAUGHN on Flickr

비록 모든 사진의 모든 순간에서 이 세상 모든 것을 아니꼬워하는 것같이 생기긴 했지만, 브루어검은지빠귀는 아주 시끄럽고 사회적인 새입니다. 번식기에는 보통 여러 쌍이 무리를 지어 서로 가까이 둥지를 짓는데, 많으면 100쌍까지도 무리를 짓죠. 또한 번식기가 지나면 다른 종의 새들과도 함께 아주 거대한 무리를 이뤄서 겨울을 나기 때문에, 혹시나 이 무리와 마주친다면 평생 받을 것보다 많은 아니꼬운 시선을 한 번에 받아볼 수 있겠습니다.


(너... 길쭉하니 좀 낯설다.......) / Bob on Flickr

오늘은 녹은 새 브루어검은지빠귀에 관해 알아보았습니다. 솔직히 이 친구들은 별다른 이유 없이 원래 벙실벙실하게 생긴 새들이 아닐까 싶은데요. 심지어 깃털을 부풀리고 동그랗게 있는 것을 좋아하기까지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뜻에서 잔뜩 빵실빵실해진 브루어검은지빠귀들의 사진 몇 장과, 또 다른 녹은 새에 관한 포스트 링크 첨부하며 오늘의 포스트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Ryan Leib on Flickr
Sri Harsha on Flickr
Kat Avila on Flickr
Kitty DuKane on Fli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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