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내용으로 건너뛰기

나이젤

Nigel, 콘크리트 러브

세상엔 여러 형태의 사랑이 있습니다. 동물의 행동을 인간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항상 경계해야 할 일이라고는 생각하지만, 때때로 사랑이 아니고서야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모습들도 관찰할 수 있죠. 오늘의 포스트에서는 조금 독특한 사랑을 하고 있는 어느 새를 소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유기물 개닛을 기다리고 있는 무기물 개닛들입니다. / ⓒ PHILIPPA SARGEANT
유기물 개닛을 기다리고 있는 무기물 개닛들입니다. / ⓒ PHILIPPA SARGEANT

오늘 소개할 새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우선 40여 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요. 1976년, 뉴질랜드 마나섬의 해안 절벽에 80마리의 콘크리트 새가 설치되었습니다. 심지어 가짜 새들 옆엔 가짜 배설물 자국까지 그려졌죠. 이는 날이 갈수록 서식지가 줄어드는 오스트랄라시안개닛(australasian gannet)의 새로운 서식지를 형성하기 위해서였는데요. 무리를 짓는 개닛을 끌어들이기 위해 콘크리트 개닛 무리를 만들어 둔 것은 좋았지만, 유감스럽게도 몇십 년이 지나도록 진짜 개닛은 단 한 마리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의 멋진 사진입니다. / ⓒ HELEN GRAY
오늘의 주인공의 멋진 사진입니다. / ⓒ HELEN GRAY

소득 없이 절벽을 지키던 콘크리트 개닛들은 2012년 같은 섬의 다른 절벽 위로 옮겨지게 됩니다. 그에 더불어 태양열로 작동하는 음향 장치로 바다에 개닛 울음소리를 재생하고, 자원봉사자들은 매년 콘크리트 개닛 옆에 가짜 배설물을 칠했죠. 이와 같은 노력은 곧 결실을 맺어 2015년 11월, 드디어 개닛이 이 절벽에 찾아오게 됩니다. 비록 단 한 마리뿐이었지만서도 말이죠. 이 개닛에게는 나이젤(Nigel)이란 이름이 붙었는데, 호주식 영어에서 나이젤은 친구가 없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하네요. 개닛은 외형으로 암수를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에 성별을 확정할 수는 없지만, 무리를 짓지 않고 혼자 다니는 것으로 보아 나이젤은 기존의 무리에서 떨어져나온 어린 수컷일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나이젤은 놀랍게도 아무도 없는 이 외로운 절벽에 머물기로 마음먹는데요. 그건 아마도 나이젤에겐 이 절벽이 외롭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 콘크리트 개닛과 사랑에 빠진 나이젤은 자신의 짝을 위해 나뭇가지와 해초를 모아 둥지를 짓고, 여러 차례 구애를 하는 등 굉장히 적극적으로 사랑을 표현하였는데요. 많은 사람들은 이와 같은 행동이 일시적인 혼란 때문이며, 시간이 지나거나 살아있는 개닛 친구들이 생긴다면 사라질 것이라고 여겼죠.


나이젤의 둥지는 굉장히 전망이 좋아 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군요. / Friends of Mana Island on facebook
나이젤의 둥지는 굉장히 전망이 좋아 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군요. / Friends of Mana Island on facebook

2016년 10월, 나이젤에 이어 또 한 마리의 개닛이 이 절벽을 찾았고 노먼(Norman)이란 이름이 붙었습니다. 그리고 2018년 두 마리의 개닛이 더 찾아오며 이 절벽의 총 개닛 수는 네 마리(+팔십 마리)가 되었죠. 드디어 새 세 새 친구가 생긴 나이젤입니다만, 나이젤은 세 새 새 친구를 피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여전히 콘크리트 개닛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요. 위의 사진에서 붉은 동그라미로 표시된 네 마리의 개닛 중 가장 위의 개닛이 나이젤이라는 것에서 나이젤과 다른 개닛들과의 관계를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더 효과적으로 개닛을 끌어들이기 위해 콘크리트 개닛이 채색되고 있습니다. / Friends of Mana Island on facebook
더 효과적으로 개닛을 끌어들이기 위해 콘크리트 개닛이 채색되고 있습니다. / Friends of Mana Island on facebook

비록 나이젤이 콘크리트 개닛을 제외한 다른 개닛과는 그다지 유의미한 상호작용을 하지 않지만, 나이젤이 그곳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다른 개닛들을 끌어들이는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섬에서 만난 새 세 개닛들은 서로 꽤 잘 지내고 있다고 하니, 일이 잘 풀린다면 여기에 새로운 오스트랄라시안개닛 서식지가 형성될지도 모르죠.


무언가에 대해 논쟁중인 나이젤과 노먼입니다. / Friends of Mana Island on facebook
무언가에 대해 논쟁중인 나이젤과 노먼입니다. / Friends of Mana Island on facebook

오늘은 콘크리트 개닛과 사랑에 빠진 오스트랄라시안개닛 나이젤의 이야기를 알아보았습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 중에서도 분명 이 세상에 실존하지 않는 존재를 사랑하고 있는 분들이 계시리라 생각하는데요. 결국 중요한 것은 상대의 실존 여부보다는 사랑하는 마음이 아닐까도 싶습니다. 사실 이쪽 계열로 더 유명한 새로는 일본의 한 동물원에 살았던 훔볼트펭귄이 있는데, 이 친구에 대해서도 언젠가 소개할 날을 기약하며 오늘의 포스트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새 글을 씁니다

새을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댓글

SNS 계정으로 간편하게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